책소개
이갑철(李甲哲, 1959- )의 사진은 우리 땅의 사람과 자연을 스트레이트기법으로, 그러나 어딘가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담아낸다. 이는 팔십년대부터 최근까지 이어진 연작들을 거치며 심화된 주제의식과, 빠른 스냅 샷 기법의 단련을 통해 이룬 그만의 사진세계다. 색다른 장소나 상황에 대한 호기심, 사진적 순간성에의 탐구로 시작된 ‘거리의 양키들’,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구조물의 관계에 주목했던 ‘도시의 이미지’, 이 땅에 만연해 있는 사회적 불평등에서 비롯된 소외감을 다룬 ‘타인의 땅’을 거쳐, 우리 전통과 문화의 정신을 찾는 ‘충돌과 반동’ 연작에 이르러 그 기묘한 세계는 절정에 달한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개인의 영역으로 끌어 와 ‘기록’하지 않으면서 말하려 한 이갑철의 문법은, 다큐멘터리 장르의 확장이자 그의 사진을 현대적이고 당대적이게 하는 지점이다.
‘열화당 사진문고’ 『이갑철』에는 이같은 그의 대표적 연작에서 엄선된 65점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이십여 년 동안 이어진 이갑철 작품세계의 변모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또한 심도있는 인터뷰를 통해 그의 일대기와 사진세계를 조명한 시인 배문성(裴文成)의 작가론과, 사진에 부치는 작가 자신의 짧지만 강한 메시지들은, 그의 사진을 읽는 새로운 해석의 창이 된다.
‘열화당 사진문고는’ 2017년부터 새로운 디자인과 제본으로 기존의 단점을 개선하고, 이후 출간되는 개정판과 신간에 이를 적용해 오고 있다. 이번에 출간하는 『이갑철』 개정판 역시 새 표지로 단장하고, 일부 작품 교체, 영문 연보 추가, 오류 및 최신정보 등을 보완하여 다시 내놓는다.
목차
‘나의 기억’이 바라본 한국인의 정체성 / 배문성(裵文成)
사진
작가 국문 연보
작가 영문 연보
저자
이갑철
출판사리뷰
‘나의 기억’이 바라본 한국인의 정체성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예술가라면, ‘한국인은 누구인가’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그가 사진가라면, 숙명적으로 ‘지금 여기’의 현실과 더욱 밀접해지기 마련일 터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많은 사진가들이 ‘세계 보편의 것’이나 ‘그림 같은 사진’으로 눈을 돌려 자신의 무대를 넓히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직 사진만이, 한국 사진가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지켜 나가는 것은 더 힘들고 중요하게 되었다. 사진가 강운구(姜運求)의 말대로, 우리에겐 “자기 장르의 고유한 문법을 존중하면서 새롭고 다른 이미지를 형성하려고 고심하는 작가”가 필요했고,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삼세대를 대표하는 이갑철은 이 어려운 과제를 진지하고도 재치있게 해냈다.
멀리 임응식(林應植)에서부터, 육명심(陸明心), 주명덕(朱明德), 강운구, 김수남(金秀男)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계보에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가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이갑철의 사진도 이들의 맥을 잇는다. 하지만 ‘한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이제는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유효한 질문에 대해 이갑철은 다르게 답하고 있다. 첫 개인전을 연 1984년부터 이십여 년 동안 이어진 굵직한 연작들을 거치며 완성된 그의 대표작 ‘충돌과 반동’이 바로 그것이다. “‘충돌과 반동’은 나의 유아적 기억을 담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와 자식의 기억, 그런 기억이 가지고 있는 행복했지만 가슴이 아려 오는, 슬픈 것은 아닌데 어딘가 애절한 그런 기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일세대, 이세대 사진가들이 한국인 공동체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다면, 이갑철은 이처럼 ‘나’ 개인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의 사진을 이전 세대와 다르게, 현대적이고 당대적이게 하는 지점이다.
‘기록하지 않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나는 같은 한국의 다큐멘터리를 찍어도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진가들과 그렇게 오래 다녔어도 남들 보는 곳을 보지 않았다. 쳐다보지도 않았다. (…) 프레임이 정상적일 때는 찍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프레임이 잘릴 때, 기울어질 때, 흩어질 때, 그 찰나의 순간에 나의 기억이 지나간다. 그 순간만이 내 진면목을 드러낸다.” ─이갑철
기억은 생각하지 않는 뜻밖의 순간에 존재를 드러낸다. 그는 감춰져 있던 개인의 기억을 불러내는 데 재빠른 스냅 샷, 기울어진 프레임, 빗나간 초점을 효과적인 장치로 사용한다. 마치 아무런 준비도 없이 휙 지나치며 찍어 버린 듯, 삶의 모든 이치를 헤아린 무의지의 행위인 듯 보이는 이 스냅 샷의 순간은, 기계적 형식적 순간성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정조(情調)를 동반하는 순간성이다. 그는 이 순간을 정확히 잡아내기 위해, 자신의 일상 생활 전체를 ‘스냅 샷을 위한 구도(求道)의 길’로 만들어 놓는다. 즉 평소에 명상과 산책을 쉼 없이 하여 마음을 갈고 닦으며, 심지어 사진을 현상할 때마저도 기억이 퍼 올려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마치 접신(接神)을 하는 제사장(祭司長)처럼 작업을 한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나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시간이다. (…) 죽도록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사진이 나올 수 없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찰나에 찍는 순간, 전체 구도가 결정된다. 마치 명사수처럼 순식간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 존재와 가치, 행동과 생각이 분리되는 시대에, 이갑철은 자신의 작품에서 표현된 마음을 똑같이 일상에서도 구현함으로써 이 둘을 일치시키고 있는 드문 예술가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개인의 영역으로 끌어 와 ‘기록’하지 않으면서 ‘말’하려 한 그만의 문법이, 도시 속 사람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는 다음 작품들에서 또 어떤 절묘한 순간으로 보여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