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미술평론가, 시인, ‘현실과 발언’ 창립동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영상원장 최민(崔旻, 1944-2018). 이 책은 1970년대 중반부터 사십여 년 동안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과 미발표 글을 모은 최민의 최초이자 유일한 저서로, 한국 문화예술 현대사의 단면이자 그 시대를 살아 간 한 지식인의 고뇌가 담긴 기록이다. 이미지 연구, 미술비평, 사진비평, 전시평, 작가론, 영화시론, 미술사, 문학평론, 서평, 단상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남긴 글들은 그 분량과 주제의 폭, 내용의 깊이가 상당하다. 제목이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듯, 그의 글은 최민이라는 사람을, 그가 관통한 시대를 충실히 비춰 보여준다. 유고(遺稿) 문집은 오랜 역사를 가진 출판의 형태로, 한 사람과 시대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읽기’의 한 방법이며, 『글, 최민』은 바로 그 단정한 본보기 중 하나다.
목차
서문
너르고 느린 경각警覺의 글밭에서-이섭
이미지의 힘
미술 속의 영화, 영화 속의 미술 / 미술과 영화 / 자크 모노리 회화의 영화적 효과 / 저공비행, 활강, 그리고 놀이 / 기억과 망각(메모) / 이미지의 힘
미술의 쓸모
전위前衛와 열등의식 / 미술과 사치 / 반성, 사고하는 미술인이길 / 미술 우상화偶像化의 함정 / 한국 미술비평의 현주소 / 전시회장-떠들썩해야 할 자리 / 미술가는 현실을 외면해도 되는가 / 미술작품을 보는 눈 / 복제 미술품의 감상 / 이미지의 대량생산과 미술 / 고정관념의 반성 / 미술은 물건인가 / 미술작품과 글 / 환원주의적還元主義的 경향에 대한 한 반성 / 의사소통으로서의 미술 / 최소한의 윤리 / 국제화 시대와 민족문화 / ‘국제미술’이라는 유령 / 평화를 그리기 / 격변하는 사회의 미술의 한 양태 / 영어 못하면 미술가 아니다? / 시각문화연구에서 ‘민족적’이라는 것
전시장 안과 밖에서
공백空白과의 대화 / 절충주의와 학예회 / 「도시와 시각」전에 부쳐 / 우리 시대의 풍속도 / 영혼의 외상外傷을 드러낸 기호들 / 미술의 쓸모에 대한 의문 제기 / 싸늘한 실험미술의 화석 / 한 시대의 초상들 / 욕망하는 육체 / 만화는 살아 있다 / 담담한 경지 / 민정기의 산수, 화훼를 음미하기 위한 몇 가지 마음가짐 / 음울한 시대의 알레고리 / 민정기의 대폭산수 / 빛, 공간, 길: 민정기의 새로운 풍경화 / 상상력의 자장磁場 /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기 / 기호의 무위無爲: 오수환의 작업에 대한 몇몇 생각 / 여운의 검은 소묘 / 재현, 수사학, 서사 / 황세준의 도시풍경 / 클로즈업의 미학 / 이제의 유화
사진의 자리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 / 떠도는 섬 / 춤과 사진이 만나는 곳은 어디일까 / 희망과 안타까움 / 상투성과 피상성을 넘어 / 스트레이트 포토, 리얼리즘, 다큐멘터리 / 정범태의 발견 / 기록, 예술, 역사
영화, 시대유감
영상시대와 문학 / 영화적 개인 / 갈수록 빨라지는 영화 / 왕자웨이와 전태일 / 영화와 젊음 / 새로운 작가주의 / 영화와 말 / 시네필리 만세, 그러나… / 미국에서 「검사와 여선생」을 보고 / ‘사진영상의 해’ 유감 / 작은 갈등 / 스크린쿼터 양보론, 그 근시안적인 시각 / 스크린쿼터는 한국영화의 생명선이다 / ‘문화맹文化盲’ 정부 / 한국영화 방송쿼터 늘려라 / 또 다른 국제영화제의 필요성 / 국제영화제를 국가전략사업으로 / 영화교육에서 국제적 교류의 필요성 / 가깝고도 먼 이웃 중국 / 왜 영화마저 험악한가 / 제한 상영관 / 영화, 시대를 증거하는 도큐먼트 / 민중생활사 자료로서의 픽션 영화 / 홍상수 그리고 ‘영화의 발견’ / 영화 「극장전」을 보고 / 최초의 떨림
서구미술의 정신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학살〉 / 외젠 들라크루아의 〈알제리의 여인들〉 /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 열차〉 /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 /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 카미유 피사로의 〈루브시엔느의 길〉 / 폴 세잔의 〈레스타크에서 본 마르세유만〉 / 빈센트 반 고흐의 〈고흐의 침실〉 / 대大 피터르 브뤼헐의 〈시골의 혼인 잔치〉 / 렘브란트 판 레인의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 엘 그레코의 〈요한계시록의 다섯번째 봉인〉 / 앙리 루소의 〈꿈〉 / 현대판 신화 〈게르니카〉의 환국還國 / 벤 샨의 예술과 생애 / 마르셀 뒤샹 / 현대로 이어진 서구의 풍속화 정신
생각의 조각
문화재 복원의 허실 / 이발소 그림 / 교양의 옷 / 채색된 도시 / 눈요기 문화 / 책꽂이 장식 / 상품화에 떠밀린 문화의 본질 / 문맹과 영상맹 / 비엔날레 전시장 한가운데서 / 첫 전쟁 이미 치러졌다 / 유행과 획일주의 문화 / 서구문화중심주의
책과 사람들
한국미술사의 철학 / 예술과 사회 / 미술의 세계로 향하는 첫걸음 / 동서 비교미학의 서설적 탐구 / 시각문화연구의 새로운 도전 / 타협 없는 렌즈가 토해낸 시대의 분노 / 한 미술 집단의 증언 기록 / 돈과 문화예술의 결합, 치열한 경쟁 현장 기록 / 영혼에 각인된 커다란 이미지 / 영상원총서를 펴내며 / 새로 나온 영화 전문지 / 영상문화저널 『트랜스』를 위한 제안 /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화 / 교육현장의 고발 / 소시민의식의 극복 / 열화당과 나 / 판잣집 밥상 위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 그와의 만남이 있어서 좋다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 / 문자 그대로 인간적으로 /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
발문
어린 최민과 서툰 열화당의 성장기成長記-이기웅
수록문 출처
최민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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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최민
출판사리뷰
최민을 읽는 방법
미술평론가, 시인, ‘현실과 발언’ 창립동인,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영상원장 최민(崔旻, 1944 - 2018). 지난 2018년 5월 세상을 떠난 그는 생전에 몇몇 번역서와 시집 외에 제대로 된 저서 한 권 출간하지 못했다. 그의 뛰어난 통찰력과 필력을 생각하면, 더구나 요즘처럼 책을 너무도 쉽게 내는 시대에서 보자면 꽤나 놀랍다.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려는 욕망이 없었던 그의 성정으로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세 월 동안 그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부지런히 글을 썼다. 이미지 연구, 미술비평, 사진비평, 전시평, 작가론, 영 화시론, 미술사, 문학평론, 서평, 단상 등 다양한 분야의 경계를 넘나들며 짧거나 긴 글들을 잡지나 일간지에 꾸준히 기고했는데, 그 분량과 주제의 폭, 내용의 깊이가 상당하다. 이번에 출간된 『글, 최민』은 1970년대 중 반부터 사십여 년 동안 여러 매체에 발표한 글과 미발표 글을 모은 최민의 최초이자 유일한 저서로, 한국 문 화예술 현대사의 단면이자 그 시대를 살아 간 한 지식인의 고뇌가 담긴 기록이다. 제목이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듯, 사십여 년에 걸쳐 이어지는 글들은 최민이라는 사람을, 그가 관통한 시대를 충실히 비춰 보여준다.
방대한 글을 만나기에 앞서 그를 따르며 가까이했던 전시기획 자 이섭의 서문 「너르고 느린 경각(警覺)의 글밭에서」가 나온다. 그 는 최민을 이해하는 몇 가지 방향과 그의 글을 읽는 의미를 짚어 주 되,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독자들이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을 만큼만 안내한다. 그에 따르면, 최민의 글은 당대 현실에 근거하고 있지만 ‘지금 여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거기엔 전문가적 지식과 ‘제대로 아는 것’ 사이의 간극을 좁혀 가려는 끊임없는 성찰, 다른 사람과 대화하고 타 분야와 소통하기 위한 열린 태도가 일관되게 담겨 있다고 한다.
본문에는 최민이 1976년부터 2018년까지 쓴 134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아주 짧은 잡문이나 상당 부분 중복되는 경우 외에는 가능한 한 모두 망라하려 했다. 글의 성격이나 주제에 따라 크게 8개 묶음으로 나누고 그 안에선 연도순으로 배열하되 연관 주제는 이어지도록 적절히 조 정했다. 프랑스 유학 시절과 직후 이어진 이미지 연구(‘이미지의 힘’)를 가장 먼저 배치하고, 미술비평(‘미 술의 쓸모’), 전시평 및 작가론(‘전시장 안과 밖에서’), 사진비평(‘사진의 자리’), 영화시론(‘영화, 시대유감’), 서양미술사(‘서구미술의 정신’), 짧은 칼럼(‘생각의 조각’), 서평 외 산문(‘책과 사람들’) 순으로 구성 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방식일 뿐, 읽는 방법은 각자 찾아 나가도 좋다. 시대별이나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 를 추출해서 몇 가지 타래를 만들어 가며 읽는 것도 가능하다.
음울한 시대의 알레고리
최민의 글쓰기는 자신의 학업 및 직책 변화와 시대적 여건에 따라 대략 네 시기로 나뉘는데, 석사 졸업 후 유 학을 떠나기 전까지(1972-1983), 파리 유학 시기 및 귀국 직후(1984 -1994),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원 장 및 교수로 재직하던 시기(1995- 2010), 퇴임 이후부터 말년까지(2011- 2018)이다. 물론 시기별로 명확 하게 구획되는 양상은 아니지만 전체를 조망하며 읽어 나가는 데는 도움이 될 만한 구분이다.
첫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1970년대 말, 대학원 미학과 졸업 후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학생중앙』에 유럽 미 술의 거장들을 소개하는 코너를 연재하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번역하는 등, 입문적 성격의 서양미 술 관련 글을 쓰고 옮기는 작업을 한다. 이는 당시 국내에 미술애호가들이 생기고 미술사를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의 욕구가 일어나던 때였기에, 잡지나 단행본 출판 환경에서 여러모로 필요했던 글쓰 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최민의 생각이 비교적 투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미술비평문들이다. 1970 - 1980년대 한국은 군사 독재정권 아래 압축적 경제성장을 거치며 정치사회적으로 긴장과 갈등을 만들어냈다. 혈기 넘치는 이삼십 대였던 그에게 이러한 현실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 예술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은 고민거리를 안겼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때의 글에는 예술지상주의, 미술 우상화, 속물주의, 절충주의, 환원주의를 경계하고, 서구미술과 전위예술을 향한 우리 예술가들의 열등의식, 비평가의 자세를 비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 는 1979년 시작된 진보적 미술운동 단체 ‘현실과 발언’의 창립동인이었던 그의 활동 반경과도 무관하지 않 다. 1977년에 쓴 「전위와 열등의식」에서 그는 서구의 전위미술이 한국 작가들의 현실에서 ‘겉치레만의 모 방’이 되면서 보이는 기형적인 폐단을 비판하며, “전위는 그 논리상 그것을 전위일 수 있게 하는 시대적, 사 회적 필연성에서 비롯”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1982년에 처음 발표하고 1985년 개고해 『시각과 언어 2』에 수록한 「최소한의 윤리」에서는 “비평가의 작업은 작가들의 작업이 끝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과 같은 지점에서 동시에 시작”해야 하며, “비평의 참다운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평가들 자신이 만인 앞에서 벌거벗고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고 (자신을 포함한) 비평가들의 책무를 호되게 일깨운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전시평 및 작가론, 서평, 칼럼 등에도 공통되게 흐르는데, 현실과 유리되지 않고 ‘미술 과 생활’의 간극을 좁히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예술가를 높이 평가한 민정기 작가론 「음울한 시대의 알레고 리」(2004)에서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다다적 반항이며 미술과 생활 사이의 거리를 없애 버리려는 급진적 기획이다. 이 점에서 나는 민정기를 주재환과 더불어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아니 해방 이후 지금까지 등 장한 여러 화가들 가운데 미술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는다.” 최민은 예술과 현실과 사이에 서서 시 대와 호흡하는 동시에 한발 떨어져 비판적이고 깨어 있는 눈을 유지했다.
칸막이를 허물고 - 이미지 연구
1983년 파리 1대학 팡테옹-소르본으로 유학을 떠난 최민은 1984 -1985년 박사학위 준비 논문으로 「자크 모노리 회화의 영화적 효과」를 제출, 1993년 「영화가 회화에 미치는 영향: 1960 -1970년대 신구상회화의 경우」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아 십 년 만에 귀국한다. 논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특정 예술 분야 에 머물지 않고, ‘이미지’라는 큰 개념 아래 예술 분과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노력한다. 따라서 귀국 후 그의 글쓰기는 ‘이미지 연구’로 종합되며, 중요성을 고려해 이 글들을 본문 가장 처음에 배치했다. 넓은 시각 에서 풀어내야 하다 보니 대부분 이 주제는 긴 호흡으로 씌어졌는데, 첫번째 글 「미술 속의 영화, 영화 속의 미술」(1994)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미지 문명’의 시대에 한 예술만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려 해도 필연적으 로 다른 예술과의 관계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직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여러 예술 사이에 부단히 맺어지는 복잡다단한 중복적, 중층적 연계는 다른 예술과의 관계를 일체 무시한 채 한 예술만을 공 략하여도 충분히 그 속성(본질?)을 밝혀낼 수 있다는 종래의 미학적 신념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고 있다. (…) 모든 것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이제 관계만이 문제될 뿐이다. 영화와 회화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그 둘과 그 밖의 다른 예술들, 그리고 예술이라고 불리지 않는 것들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영화, 시대유감’ 아래 포함된 「‘사진영상의 해’ 유감」(1998)에서는 이런 심경을 좀 더 직설적이고 강한 어 조로 피력한다. “소위 예술이라는 분야 안에서의 이러한 ‘칸막이 사고’란 시대착오적일 경우가 많다. 나는 문화나 예술이라는 것은 서로 다양한 인자들이 한데 뒤섞여야 발전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일종의 잡종강세 론이다. 영화하는 사람들은 영화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이고 사진하는 사람들은 사진하는 사람들끼리만 모 이고 문학하는 사람들은 문학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는 창의성이 나오기 힘들다.” 그가 1994년 영상원장 으로 내정되었을 때 발표한 ‘한 종목에만 집착하는 칸막이 사고에서 벗어나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와 경험 을 쌓게 하겠다’는 교육방향 역시 이런 오랜 확신에 기초하고 있다.
새로운 미술의 기운
한국을 떠나 있던 유학기에는 국내 매체에 기고할 기회가 없어, 논문 외에는 십 년 정도의 글쓰기 공백이 보 인다. 귀국 후 쓰기 시작한 비평문이나 칼럼에서는 ‘세계화’ ‘국제화’ ‘민족주의’ ‘한국적인 것’ 등의 어휘들 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한국은 1990년대에 들어와 민주정치 체제가 자리잡으면서 소비사회로 진입하고, 디 지털 혁명, 정보화, 세계화 등으로 인해 일상과 문화 전반에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1980년대의 민중미술운 동 열기가 식자, 미술은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영합하려는 움직임이 커졌지만, 반대로 ‘우리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 역시 동시에 존재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상반된 입장 사이에서 불안과 혼란을 느꼈고, 이런 말들을 성찰 없이 상투적으로 사용했다.
오랜 학업을 마치고 기성세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사오십대의 최민은, 이 문제에 대해 한층 유연하고 폭 넓어진 시각에서 자신의 관점을 밝힌다. 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분법으로는 오늘날의 복잡한 문화 상황이 설명되지 않으며, 문화나 예술 앞에 ‘민족’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우리의 관점을 좁혀 버리는 꼴이 된다고 보았다. 「 국제화 시대와 민족문화 」 (1994)에서, 서로 다른 두 문화의 접촉은 새로운 창안들이 생겨나게 하며, 다음 세대의 문화에 대해 앞선 세대가 무어라 지시할 권한도 능력도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 려 민족주의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 민족의 이해관계를 보편적 시야에서 반성해 볼 줄 아는 ‘보편주의’ 가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 「‘국제미술’이라는 유령」(1999)에서 역시, 국제적 네트워크와 접속하되 독자적 인 네트워크를 형성할 줄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 미술시장 속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미술의 기운’이라고 말한다. “이 기운은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진정으로 새로운 미술일 것이다.” 최민에게는 ‘세계’냐 ‘민족’이냐 따위의 문제보다 ‘새로운 시대에 맞 는 진실한 미술’이 중요했다. 이는 대부분의 글에서 견지하고 있는 그만의 균형있는 태도다.
영화를 둘러싼 조건들
영상원장으로 재직하던 2000년대에는 영화산업과 영화제 등 제도적인 영역에서 많은 활동과 토론을 하게 되고, 자연히 이에 대한 애정과 현실적 문제점을 여러 글에서 피력한다. 그렇다 보니 영화평론 등 영화 자체 에 대한 글보다는 시론(時論) 성격이 강하고, 비교적 짧은 길이로 일간지나 영화전문지를 빌려 대중이나 정 책입안자들에게 호소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대표적으로 스크린쿼터제(일 년에 일정한 일수 이상 한국영 화를 상영하도록 하는 국산영화 의무상영 제도) 사수를 위해 영화계에서 시위가 활발히 벌어지던 때의 글들 이 그것인데, 1998년 「스크린쿼터 양보론, 그 근시안적인 시각」을 시작으로 2000년대 초까지 여러 편이 이 어진다.
200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으로 선임되면서 새로운 국제영화제가 왜 필요한지 주장하는 글 역시 연달아 등장한다. 이 조그만 나라에 국제영화제가 너무 많아 국가적 낭비가 아니냐는 일부 회의적 인 시선에 다음과 같이 응대한다. “관객 스스로 직접 경험을 통해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개성적으로 가꾸고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국제영화제의 교육적 가치는 무한하다.” 그밖에 영화교육의 새로운 개념, 국제교류의 필요성, 영화의 도큐먼트적 가치 등, 영화라는 매체, 영화언어를 둘러싼 여러 조건 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게 어떻게 변화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영화시장은 전 지구화되었지만 영화산업은 국가적 단위에 있는 이율배반적 현실, 그리고 디지털혁명에 의한 시청각 환경의 급격한 변화 등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것의 정체성이 모호해짐에 따른 성찰들이다.
문화예술 출판물의 지형도
최민은 뛰어난 번역가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성향이 그러한 만큼 책과 문학을 향한 애정과 관심은 평생에 걸쳐 이어졌다. 이는 그가 모은 방대하고 체계적인 장서( 藏 書 )로도, 이 책 마지막 장으로 할애된 ‘책과 사람 들’의 서평과 문학평론, 사람들과의 사연에서도 증명된다. 그중 열화당과의 인연은 각별한데, 그가 쓴 「 열 화당과 나 」 (1996)라는 글과 이에 화답하듯 이번에 새로 씌어진 이기웅 열화당 대표의 발문 「 어린 최민과 서 툰 열화당의 성장기( 成 長 記 ) 」 가 이를 증거한다. 둘은 최민이 대학원을 갓 졸업한 이십대에 처음 만나 미술출 판의 시작을 함께 했는데, 이들의 글에서 젊은 지식인의 인간적인 모습과 우리나라 초창기 예술출판의 몇몇 순간을 잠시 엿볼 수 있다.
한편, 이 책은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우리나라 문화예술 간행물의 대략적인 지형도를 조망할 수 있게 도 한다. 프랑스 유학기나 퇴임 후에는 아무래도 기고 횟수가 줄어들고 글의 성격도 달라지지만, 가장 활발 하게 발표한 1970 -2000년대 지면들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잡지들이기 때문이다. 전시 팸플릿과 학생지를 제외한, 최민의 예술 관련 글이 가장 처음 나오는 매체는 『 미술과 생활 』 로, 1977년 4월 창간되어 임영방이 주간으로 있었고, 성완경, 주재환 등 미술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작가나 비평가들이 편집인으로 참여했다. 1979년 9월에 결국 폐간되었지만, 1976년 창간된 『계간미술(季刊美術)』(지금의 『월간미술』)과 더불어 우 리나라의 선구적인 미술잡지 중 하나다. 그밖에 『미술춘추(美術春秋)』(1979년 5월 창간), 『예술평론』(1981 년 12월 창간) 등에도 글을 썼다. 또한 초기에는 일반인이나 학생들의 교양을 위한 글쓰기도 했는데, 『학생중앙』 같은 소년지, 『정경문화(政經文化)』(옛 『정경연구(政經硏究)』, 지금의 『월간경향』) 『문화연대』 『문화과학』 『중앙』 『신동아』 『문예중앙』 『동서문학』 『창비문화』 『창작과 비평』 등의 문예지, 『뿌리깊은 나무』 『문화와 나』 등의 문화 대중 교양지뿐만 아니라, 『공동선』 『대화』 같은 가톨릭 잡지에도 다양하게 기고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영화 관련 글들이 많은 만큼, 『영상문화정보』(한국영상자료원), 『영화소식』(영화진 흥공사), 『 트랜스(Trans) 』 『 씨네21 』 등에 실렸고, 연속간행물 외에는 전시 도록이나 팸플릿의 전시평, 단행 본에 포함된 역자 후기나 추천사, 간행사 성격의 글 등이 있다. 모든 글의 관련 서지는 책 끝에 ‘수록문 출처’ 로 정리해 일별하도록 했다.
저자가 자신의 글을 꼼꼼하게 스크랩해 두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글을 찾아 다시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지난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누락된 글들이 있을 수 있어, 이후 추가로 발견되는 대로 축적하여 적절한 시기 에 반영하도록 할 예정이다. 부족하나마 한 인물과 연결된 출판의 사례를 보여주는 일차자료로서, 예술분야 서지연구의 기초가 되리라 기대한다.
이 책은 언뜻 흔한 글 모음집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유고( 遺 稿 ) 문집 출판은 오랜 역사를 지 니고 있다. 요즘은 책을 하나의 상품으로 기획, 집필, 출판하는 것이 가장 표준적인 방식이 되어 버렸으나, 본래는 한 사람이 생전에 남긴 글을 모으고 그를 제대로 아는 가까운 이의 글을 덧붙여 정리함으로써, 후대 가 역사를 배우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토대로 삼기 위한 목적이 컸다. 고답적인 형식일지라도 실은 가장 기 본적인 ‘읽기’의 한 방법이며, 『글, 최민』은 바로 그 단정한 본보기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