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미술평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여든을 넘긴 나이인 지금도 농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존 버거(John Berger). 오랫동안 존 버거는 스피노자의 스케치북을 찾는 상상을 했다. 놀라운 명제를 남긴 철학자 스피노자가 두 눈으로 직접 관찰했던 것들을 살펴볼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느 날 아름다운 스케치북을 선물받은 존 버거는 거기에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벤투의 스케치북(Bento’s Sketchbook)』이다.
존 버거는 세심한 눈길로, 그의 일상과 주변인물, 그들과 함께하는 작은 경험 들을 담아낸다.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들.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삶의 편린들. 버거는 그것들을 글 혹은 그림으로 지면에 우아하게 옮겨낸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베끼다 쫓겨난 이야기, 아내의 요양비를 걱정하는 은퇴 정비기사와 정치적 억압을 피해 고국을 떠난 망명자가 처한 곤궁함, 스스로 ‘건축적 구조의 본질’이라고 이른 붓꽃 드로잉, 그리고 용기있게 세상의 폭력에 저항한 작가들?케테 콜비츠,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안톤 체호프,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룬다티 로이?과 버거가 기억하고 해석하는 역사의 단편 등, 각각의 꼭지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흐르며 스케치북 전체를 완성한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을 대신하여, 존 버거가 글과 함께 보내온 드로잉
벤투의 스케치북
간략한 전기
감사의 말
옮긴이 주(註)
옮긴이의 말
저자
존 버거 (지은이), 김현우, 진태원 (옮긴이)
출판사리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둘?벤투와 나?을 점점 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바라보는 행동, 눈으로 질문하는 행동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내 생각에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이끌어 가는 어딘가, 혹은 그 무언가에 대한 인식을 우리가 공유했기 때문이다.”(본문 p.12)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
철학자 스피노자(B. Spinoza).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포르투갈계 유대 혈통인 스피노자(바루흐, 베네딕투스 혹은 벤투 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는 철학의 외부에서 철학을 탐구했다. 데카르트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은 데카르트를 비판하며 정립한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면서, 데카르트의 이분법을 넘어선 일원적 세계관을 사유했다. 스피노자는 짧은 생애 동안 지치지 않은 열의로, 읽고 사색하고 토론하며 글을 썼다. 철학적 활동 외에 렌즈 세공으로 생계를 이어 간 그는, 종종 드로잉을 하기도 했다. 항상 스케치북을 지니고 다녔는데, 현재 전해 오고 있지는 않다.
미술평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여든을 넘긴 나이인 지금도 농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는 존 버거(John Berger). 오랫동안 존 버거는 스피노자의 스케치북을 찾는 상상을 했다. 놀라운 명제를 남긴 철학자 스피노자가 두 눈으로 직접 관찰했던 것들을 살펴볼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어느 날 아름다운 스케치북을 선물받은 존 버거는 거기에 스피노자의 시선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벤투의 스케치북(Bento’s Sketchbook)』이다.
사소함의 연대가 갖는 힘
『벤투의 스케치북』에서 존 버거는 세심한 눈길로, 그의 일상과 주변인물, 그들과 함께하는 작은 경험 들을 담아낸다.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들.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삶의 편린들. 버거는 그것들을 글 혹은 그림으로 지면에 우아하게 옮겨낸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베끼다 쫓겨난 이야기, 아내의 요양비를 걱정하는 은퇴 정비기사와 정치적 억압을 피해 고국을 떠난 망명자가 처한 곤궁함, 스스로 ‘건축적 구조의 본질’이라고 이른 붓꽃 드로잉, 그리고 용기있게 세상의 폭력에 저항한 작가들?케테 콜비츠,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안톤 체호프,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룬다티 로이?과 버거가 기억하고 해석하는 역사의 단편 등, 각각의 꼭지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흐르며 스케치북 전체를 완성한다.
드로잉이란 행위는 세계와 만나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된다. 무언가를 그리려면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고, 바라봄은 발견이고 관심이다. 하지만 드로잉은 그 자체로 완성되지 못한다. 존 버거는 말한다. “자연의 고정된 외곽선은 모두 임의적이고 영원하지 않습니다.”(본문 p.119) 또 정의한다. “드로잉은 수정이다.”(본문 p.14)
“종종 머릿속 이미지가 종이 위의 이미지보다 더 또렷할 때가 있었다. 나는 다시 그리고, 또 다시 그렸다. 이것저것 바꿔 보고 다시 지우는 사이 종이는 회색이 되었다. 그림이 더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 수정을 하려는 나의 노력과 그것을 견뎌낸 종이가, 마침내 마리아의 몸이 지닌 탄력을 닮아 가기 시작한 것이다. (…)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본문 p.20)
하나의 존재로 자리잡아 가는, 세련되지 않았지만 어떤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시간, 그 길에 이르는 합일을 향한 ‘노력(conatus, 코나투스)’은 연장(延長)되는 과정이다. 서로 다른 지평에 서 있는, 보는 행위의 주체와 그 대상이 만날 때, 스피노자가 사유한 편재적(遍在的) 법칙은 그 둘에 똑같이 적용된다. 스피노자가 활동한 17세기는, 이제 막 신에게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한 근대의 태동기였다. 렌즈를 깎고 드로잉을 하면서, 스피노자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가 발견한 일원적 세계에서, ‘본다’는 사소한 행위를 통해 ‘우리’는 연대할 수 있을까?
책 곳곳에 담긴 압제에 대한 저항과 연대에의 내밀한 호소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버거 나름의 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글과 그림 사이로, 『윤리학(에티카, Ethica)』을 비롯한 스피노자의 저작에서 인용한 문구가 함께 놓여 있는데, 스피노자의 문장은 존 버거의 글 그림과 짜임새있게 어우러져 온전한 의미를 만들기도 하고, 앞뒤 글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하며, 그 자체로 하나의 명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기도 한다.
이 책의 번역은 두 사람이 함께 작업했는데, 존 버거의 에세이 부분은 김현우(金玄佑)가, 『윤리학』을 비롯한 스피노자 저작의 인용문은 진태원(陳泰元)이 각각 번역했다. 스피노자 인용문의 경우, 번역의 정확성이나 문체 등을 고려해 가장 권위있는 1925년 라틴어 판을 새로 번역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책은, 제가 바라기로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 관한 책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끔찍하지만,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순간을 담고 있는 세상 말입니다.”
- 존 버거, 2011년 영국 비비시(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