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장 주네가 조형적 실존의 미를 궁구했던 20세기의 위대한 조각가이자 화가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면서 기록한 짧지만 밀도있는 예술론이다. 주네는 1954년에서 1958년까지, 4년 동안 자코메티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면서 그와 나눴던 대화, 동행, 모델로서의 참여 등을 통해 느낀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인상을 빛나는 편린들로 잡아 놓았다. 매번의 만남 후에 주네는 자신의 노트에 이 경험과 생각을 옮겨 적고, 다시 돌아와 지우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글을 완성한다.
저자
장 주네 (지은이), 윤정임 (옮긴이)
출판사리뷰
피카소가 극찬한 최고의 예술가론
1910년 12월 19일 파리 빈민구제국 소속의 작은 병원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1986년 4월 15일 새벽 파리의 작은 호텔 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했던 장 주네(Jean Genet, 1910-1986)는 문학가로 명성을 날리기 전에 온갖 폭력이 지배하는 절도, 매춘, 탈영, 마약밀매 등 밑바닥 삶을 전전했다. 누적된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를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장 콕토, 사르트르, 보부아르 등이 감옥에서 프랑스 문학계의 보물이 썩게 될지도 모른다며 대통령에게 특별사면을 요청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방대한 분량의 『성 주네(Saint Genet, Comedien et martyr)』를 통해 주네를 악(惡)의 성자로 지칭하며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주네를 꼼꼼히 분석한 바 있다.
국내에서 오래 전 번역된 두 권의 시집과 현재에도 종종 연극으로 올려지는 『하녀들(les bonnes)』로 잘 알려진 장 주네.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책이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 『자코메티의 아틀리에(L atelier d Alberto Giacometti)』는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장 주네가 조형적 실존의 미를 궁구했던 20세기의 위대한 조각가이자 화가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면서 기록한 짧지만 밀도있는 예술론이다. 주네는 1954년에서 1958년까지, 4년 동안 자코메티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면서 그와 나눴던 대화, 동행, 모델로서의 참여 등을 통해 느낀 순간적이고 직관적인 인상을 빛나는 편린들로 잡아 놓았다. 매번의 만남 후에 주네는 자신의 노트에 이 경험과 생각을 옮겨 적고, 다시 돌아와 지우고 고치기를 반복하며, 이 글을 완성한다.
피카소 역시 예술가에 관한 책 중에서 최고라고 극찬했고, 자코메티도 자신에 대해 쓴 여러 편의 글 중에서 가장 의미깊은 글로 꼽았던 이 책은, 도둑 작가로 불리던 장 주네가 시적 통찰로 어느 누구도 꺼내 오지 못한 자코메티의 가장 깊은 내면을 훔쳐낸 보석과도 같은 기록이다.
두 예술가의 대화, 그 실존에 대한 밀도있는 사유
"낡은 목재로 지어진 아틀리에는 잿빛 가루에 휩싸여 있고, 점토의 조각상들은 밧줄, 밧줄 부스러기, 철사줄을 드러내고 있으며, 회색으로 칠해진 캔버스들은 화구상(畵具商)에서의 평온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모든 것이 얼룩지고 뒤집어진 채 불안정하여 곧 무너질 듯했고, 다 녹아들어 없어져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떤 완벽한 실체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본문 중에서, p.58
이 책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침묵과 여백 속에서 그리고 먼지와 석고 가루가 떠다니는, 다 허물어져 가는 잿빛 아틀리에에서 팽팽한 긴장과 적요한 흥분을 일으키며 선문선답식으로 오가기도 하고, 거리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의 풍경을 관찰하며 느낀 점들을 나누며 인간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되새겨 보기도 하고, 작업하고 있는 자코메티 앞을 빠져나와 아틀리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본 사물 또는 소품 앞에서 문득 떠오른 한두 가닥의 기억들을 이어 가며 얘기가 오가기도 한다. 주네는 이 현장감이 주는 생생한 관음증적 욕망을, 자코메티의 작품이 주는 묘한 형태감에 대한 사유를, 예리한 관찰과 섬세한 묘사로 끊임없이 일깨우고 자극한다.
이 짧고 불규칙적인 호흡으로 연결되는 글 속에는 강렬하고 생생한 사유의 전류가 흐르고 있다. 그 힘은 두 예술가의 영혼이 팽팽하게 접속하고 있는 이 세계의 실존과 궤를 같이한다. 주네는 자코메티를 가리켜 죽은 자들을 위해 작업하는 예술가 눈 먼 자들을 위한 조각가라고 단언한다. 죽음, 상처와 소외, 완전한 고독과 비참은 주네의 눈에 자코메티의 가느다란 조각작품들이 잉태될 수 있었던 비밀스런 자궁으로 비친다. 그리고 이 지점은 문학계의 이단아로서 제도권의 변방에서 탈주해 모든 이원적 세계를 연극적 제의성으로 끌어올렸던 주네의 작품세계와 맞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자코메티가 돌이킬 수 없는 비운의 사고로 불구가 된 것에 대해 덤덤히 얘기할 때조차도 주네는 자신의 내면 밑바닥에서 한 인간이 가진 실존, 그 삶의 구석을 이렇게 끌어낸다.
"그는 절뚝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한다. 우연한 사고로 수술을 받은 후 불구가 되어 절뚝거리며 걸어야 된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자코메티는 굉장히 기뻤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본다. 그의 조각작품들이,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비밀스러운 불구 상태가 안겨 준 고독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숨어들어 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본문 중에서, p.28
한 인간으로서의 자코메티, 그의 조각을 빼닮은 글
자코메티의 아틀리에 구석구석을 해부하듯 집요하게 보고 있는 주네의 시선은 한 인간의 실존을 확인케 하는 적막하면서도 착잡한 심정을 이렇게 일깨운다. 한 시대의 자화상을 조각해 온 자코메티, 그의 잿빛 아틀리에, 그의 작품, 이 셋은 결국 하나임을.
이 책에서 우리는 예술가 이전, 한 인간으로서의 자코메티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존재를 지탱하는 예술과 작업이 궁극적으로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있는지에 대한 기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네와 자코메티, 이 두 사람의 시선이 가 닿는 곳곳마다 외마디 비명같이 인간이 호명되고 있음을 본다. 이 책은 두 예술가의 만남이 빚어 놓은, 어쩌면 자코메티의 조각을 그대로 쏙 빼닮은 글이다.
"아름다움이란 마음의 상처 이외의 그 어디에서도 연유하지 않는다. 독특하고 저마다 다르며 감추어져 있기도 하고 때론 드러나 보이기도 하는 이 상처는, 누구나가 자기 속에 간직하여 감싸고 있다가 일시적이나마 뿌리 깊은 고독을 찾아 세상을 떠나고 싶을 때, 은신처처럼 찾아들게 되는 곳이다. …내가 보기에 자코메티의 예술은 모든 존재와 사물의 비밀스런 상처를 찾아내어, 그 상처가 그들을 비추어 주게끔 하려는 것 같다." ―본문 중에서, p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