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왜 세상은 1프로의 이야기로 가득할까?
당신은 ‘직장의 신’도 아니며, ‘장그래’가 되지 않아도 좋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속한 조직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1프로가 아닌 99프로를 차지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나는 일 잘한다. 그런데 어딜 가나 한 명쯤은 나와 호흡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지 않겠나. 그 사람이 내 상관이고 직장의 파트너라면 나도 ‘일못(일 못하는 사람)’이 될 뿐이다. 그래서 나도 인정하기로 했다. 사실 누구나 일못일 수 있다.”
페이스북 그룹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은 2014년 7월, 처음 만들어진 이후 대놓고 ‘일 못함’을 인증하는 공간으로 유명해져 몇 차례 매스컴을 타다보니 어느덧 회원 수가 6000명이 넘었다. 아이러니하게 이제는 의외로 일 잘하는 그룹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은 페이스북 그룹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 소속 필진들이 [주간경향]에서 연재 중인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칼럼에 새로운 글을 더해 엮은 책으로, 현대 사회가 적성대로 직업을 선택하기가 어려워 노동의 형태가 획일화된 상황에서 ‘일 못함’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필진들은 목소리를 모아 일 못함의 문제가 노동권에 대한 이슈로 발전되길 바라면서, 경쟁보다는 협력을 우선시하는, 일 잘하는 사람도 일 못하는 사람도 모두 행복한 일터를 꿈꾼다.
목차
1부 일도 못한다는데 서럽기까지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 출퇴근의 달인 | 아내를 드립니다? | 덜렁이가 살고 있는 세상 | 그건 충고가 아니야, 인격 모독이지 |삼류 똥통 학교 다니는 주제에 | 튜링 테스트의 시간 | 디자이너의 비애 |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래요 | 나는 감정노동의 ‘일못’입니다 | 당신은 때리지 않았지만 나는 아팠다 | 흡연 여성 잔혹사 |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지 | 인터뷰 ) 전도사 노승훈을 만나다
2부 일 못한다, 일 잘한다 사이의 애매함
성공, 그 허망한 이름이여 | 당신은 ‘직장의 신’이 아니다 | ‘미생’이 그런 뜻이 아닌데요 | 겸손은 힘들어 | 사원의 직언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 어려워 보이기만큼 어려운 것도 없더라 | 갑과 을 사이의 줄다리기 | 쓸모와 잉여 | 딴짓하는 사람 | 미루는 습관 가지고 살기 | 그래, 나는 ‘길치’다! | 인생은 롱 테이크 | 쇼핑 사이트 헤매는 밤 | 기계 장착 시대의 업무 현황 | 나는 천사가 아니야 | 인터뷰) 방송작가 무명씨를 만나다 | 인터뷰) 글로 먹고 사는 H씨를 만나다
3부 내가 일을 못하는 일리 있는 이유
베짜타 연못가에서 한 발짝 물러서면 | 별이 빛나는 밤에 | 유니폼의 위치 | 위아래 따지지 말고 칼퇴근 좀 합시다 | 생리휴가가 어때서요 | ‘일못’은 휴가도 못 가나요? | 신성한 노동의 맨 앞자리 | 여성은 왜 가정·직장 모두를 지키면 ‘일못’이 되는가 | 대외비가 없는 세상 | 나는 별일 없이 살고 싶다 | 일 못하는 사람들의 세상 상상하기 | 괴담의 서사 구조 ― 메르스를 중심으로 | 우리는 가족이 아니잖아요 | 걱정은 ‘노 땡큐’ | 당신의 시간이 옳듯, 내 시간도 틀리지 않았다 | 인터뷰) 팝아티스트 김태훈을 만나다 | 인터뷰) 사진작가 박준수를 만나다
4부 우리 모두 행복하면 안 되나요?
우리는 아이가 아니다: 우리 노동을 지배하는 은유들(1) | 신분제는 철폐되지 않았다: 우리 노동을 지배하는 은유들(2) | 숫자 뒤에 삶이 있어요: 우리 노동을 지배하는 은유들(3) |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 노을이 지기 시작하면 우리 함께 차를 마셔요 | 최선을 다하는 일못들을 위로하며 | 돈벌이와 자아실현 사이 | 내가 나를 위해 쓰는 인생계획서 | 우리는 편의점에서 만난다 |액자 저편, 너의 목소리가 들려 | 은혜는 테이프 밖에서 | 막다른 터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빛이 있다 | 인정 투쟁과 일못의 사회학 | 인터뷰) 투쟁중인 봉혜영 씨를 만나다 | 인터뷰) ‘맥가현’을 만나다 | 필진 인터뷰
저자
김종수
출판사리뷰
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의 ‘1부 일도 못한다는데 서럽기까지’는 ‘일못 유니온’ 필진들이 일터에서의 실수담을 통해 ‘일못’임을 인증하는 내용이다. ‘반전 평화’여야 하는데 ‘반 평화’라고 인쇄된 책을 끌어안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선배의 귀한 출산 소식을 전하며 ‘득녀’를 ‘득년’이라고 써서 본의 아니게 패륜 후배가 되었던 기억, 코트를 오랜만에 바꿔 입고 출근했다가 사무실 열쇠를 두고 와 집으로 돌아간 사건 등. 연재 칼럼을 읽은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기도 했다. “저런 칠푼이도 취직을 하는데.” 이에 저자는 이렇게 응대한다. “칠푼이도 취직할 수 있는 세상이 좀 더 좋은 세상 아니겠습니까? 칠푼이도 우리 사회의 일원이니까요.”
실수가 많은 덜렁이 직원 소리를 듣는 게 당연히 마음 편할 리 없다. “장부를 쓰면서도 겁을 먹고, 문서를 처리하면서도 겁을 먹고, 공문을 쓰면서도 겁을 먹는다. 혹시 내가 실수하면 어떡하지. 물론 나는 매사에 실수를 저지르지만 실수와 혼나는 상황이 익숙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본문 24쪽).” 중요한 서류에 오타를 내고 “정신 차리고 똑바로 성의껏 하지 않을 거냐”는 상사의 핀잔에 주눅이 들면서도 억울하다. 단지 오타 하나만으로 그간 들였던 정성과 최선이 간단히 무시당해도 되는 것일까? 덜렁거리는 성격 때문에 비록 실수가 잦긴 하지만, 차선책으로 실수를 만회하는 방법을 익히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일못’들 덕분에 세상이 그나마 따뜻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서류의 오타는 잠시간 팀원들에게 큰 웃음을 주기도 하고, 무려 이면지를 생산하기도 한다. 한 필자는 키우던 고양이가 죽음을 맞았을 때 그 소식을 전하던 ‘일못’ 수의사 덕분에 크게 위로받았다고 고백한다. 의사라면 응당 환자와 유가족에게 본인의 감정적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객관적으로 환자의 상태를 알려야 하지만, 그 수의사는 그만 필자와 함께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고양이의 죽음을 ‘개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지른 수의사를 향해 필자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때때로 타인의 슬픔에 대해 울음을 터뜨리는 ‘일 못하는 사람’이 된다(본문 36쪽)”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일을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의사로서 직업적 태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그 수의사를 과연 ‘일못’이라고 탓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일 못하는 게 내 탓일까?
누군가를 ‘일 못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하는 기준은 뭘까? 한 시대의 일 잘하는 사람이 다음 시대의 부적응자가 될 수도 있다. 이전까지 직장생활 잘한다는 소리를 듣던 직원이라도 SNS 홍보 채널을 모르고, 테블릿 PC 작동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어느새 일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지금 일을 잘한다고 평가받아도 어딜 가나 한 명쯤 나와 호흡이 맞지 않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그 사람이 만약 직속상관이라도 된다면 그 순간 나는 ‘일못’이 될 수밖에 없다. 일 잘하는 사람만 뽑아놔도 결국은 그 안에서 다시 ‘일 잘하는 사람’과 ‘일 못하는 사람’으로 나뉘곤 한다. 결국 누구나 ‘일못’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필진은 이런 상대적인 개념을 기준으로 실시하는 평가의 유효성에 관해 ‘2부 일 못한다, 일 잘한다 사이의 애매함’과 ‘3부 내가 일을 못하는 일리 있는 이유’를 통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저 다른 사람보다 1시간 늦게 일을 끝냈다고 낮은 평가를 받는 건 분명 억울한 일이다. 눈치 안 보고 직언을 했다가 ‘위아래도 없는 사원’이란 평을 듣는 건 또 얼마나 억울한가? ‘내 우선순위’가 달라 미룬 일인데, 그걸 나중에 처리했다고 탓할 수 있는 걸까? 여자인데 센스 있게 커피 한잔 타 줄 ‘눈치’가 없고, 결혼을 했으면 했다고 면접 때 면박을 당하고 안 했으면 또 안 했다고 걱정을 듣는 상황은 어떠한가. 객관성이 보장된 근무평가표가 있는 것이면 모를까 대부분 직장 내 평가 기준은 모호하고 편견으로 가득하다. 성별, 학벌, 나이 등 사회적 기준이라는 틀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벗어나면 ‘일못’으로 소외시킨다. 바로 ‘표준’과 ‘평균’을 따르지 않으면 ‘정상’의 범주에서 제외시키는 것이다.
많은 분야의 사무가 서로 연결고리를 갖고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일못’과 ‘일잘’을 구분하는 일이 더 모호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촘촘히 서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노동자들은 그 복잡한 시스템 안에서 일하는 구성원들이다. ‘엑티브엑스’ 때문에 내가 할 일을 제때에 못했다면 그건 누구 탓일까? 미국에 본사를 둔 프로그램에 오류가 발생하면 대한민국의 관리자도 덩달아 야근을 해야 하는 이 시대에 말이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자기계발에 힘쓰지 않는다고 탓하지만, 그 이전에 서울의 전세 대란을 피해 수도권 외곽에서 살 수밖에 없는 직원들의 상황을 고려해야 하는 게 아닐까? 출퇴근 길이 하루 왕복 두세 시간 걸리는 집에 사는 게 내 탓만은 아니다. 한 필진은 ‘1만 시간의 법칙’을 들먹이며 “수도권 외곽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이 많은 사람들이 10년, 15년 출퇴근할 시간을 자신한테 오롯이 썼다면 어땠을까? 출퇴근의 달인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좋아하는 일의 달인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본문 17쪽)”라고 되묻는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일터를 꿈꾸다
애초에 ‘일 잘하는 사람’과 ‘일 못하는 사람’의 구분이 이렇게 모호하다면, 그냥 “우리에게 필요한 세상은 일 잘하는 사람을 잘 가려내는 세상이 아니라 일 못하는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기다리고,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세상 아닐까(본문 194쪽)”. 이 책의 ‘4부 우리 모두 행복하면 안 되나요?’에서는 경쟁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아닌, 협력으로 공생하는 일터에 대한 소망을 담았다.
현재 대한민국의 노동자 중 과연 몇이나 일에서 기쁨을 얻고 있을까? 대한민국은 OECD 가입국 중 연간 노동 시간이 길기로 소문난 국가다. 그런데 노동 생산성은 반대로 가입국 중 최하위권이다. 늦게까지 야근하는 사람을 두고 무조건 ‘일 잘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건 잘못됐다는 뜻이다. 창의성을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수많은 연구 결과가 나와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많은 직장인들이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 않고는 휴가 하루 쉽게 쓸 수 없다. 한 필자는 일본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며, 고작 1평 남짓 되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직원 네 명이 일하는 것을 보고 이런 노동환경이라면 노동자들은 월차를 낼 때도 다른 동료들에게 미안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필자는 노동자를 ‘아이’로 보는 시선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딸 같아서 그러지.” 이 말은 바로 노동자를 미성숙한 존재로 격하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사용자를 부모나 교사의 위치에 세운다. 나이 든 상사는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에게 쉽게 반말을 쓴다. 상사의 지시는 사적이라도 따라야 한다. 분명 법에서는 노동을 거래로 보고 있지 새로운 부모자식 관계로 보고 있지 않는다. 필자는 노동을 바라보는 방식이 ‘법대로’ 바뀐다면 노동자들의 자괴감도 조금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또한 우리 스스로 평가를 일삼는 ‘인정 투쟁’도 멈춰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람들은 조직에 속하면서부터 자신을 일과 동일시하고, 작업물이 부정당하면 자기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낀다. 바로 ‘인정 투쟁’의 욕구 때문이다. 학생들은 성적과 복장 규율의 잣대 속에서, 여성들은 성차별의 잣대 속에서, 가장들은 경제력의 잣대 속에서 인정받고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출신 대학에 따라, 직함이나 연봉에 따라 스스로 자기 삶을 스스로 수치화하여 평가한다. 그러나 필자는 ‘잘한다’와 ‘못한다’의 기준은 시대에 딸라 달라진다는 점을 자각하고 인정 투쟁의 지옥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지지 말아야 한다고 권한다. 어렵더라도 인정 투쟁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를 먼저 의심해보라는 것이다. “최저임금도 못 받는 어느 청소 노동자의 한 시간과 전체 노동자 평균 임금의 5배를 받는 의사의 한 시간이 공익적인 가치에서 진정 5배만큼 차이가 날 것인지(p303)” 말이다.
‘일못 유니온’의 필진들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제 모두가 ‘왜’라고 의문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일 못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은 것을 분하게 여기고 좌절감에 빠져 자포자기할 것이 아니라, 왜 내가 그런 식으로 평가당할 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되물어야 한다. 최저임금도 더 올려보고, 기본소득도 도입하는 등 제도적인 방법도 있겠지만, 우선 가장 쉬운 일부터 실천해보자고 권한다. 이를테면 시점을 변화시켜 보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요리 프로그램에 빗대면 셰프에 집중된 시선에서 벗어나 바로 설거지하는 스텝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페이스북 그룹 ‘일 못하는 사람 유니온’에는 오늘도 그런 시점을 전환해주는 글들이 올라온다. 서로 “ 네 잘못 아니야. 넌 보잘것없지 않아. 할 만큼 했어”라고 말해주면서.